누구나 행복한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쫓아 다시 복지관과 인연을 맺은 배성재 씨. 최중증 발달장애인 낮활동 사업 ‘푸르메 학교’에 참여 중인 배성재 씨와 그 곁에 함께하는 외삼촌 정원식 씨를 만나 행복의 기억이 이끈 복지관과의 두 번째 인연을 들어보았다.
배성재 씨는 10대 초반 무렵부터 이혼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병마가 찾아온 어머니로부터 돌봄을 받기 어려워지자, 입원하는 시설에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대신하여 외삼촌 정원석 씨가 보호자 역할을 맡았다. 그 또한 한 가정의 가장이었기에 조카가 입원한 시설을 주기적으로 오가며 돌봄을 이어갔다.
“당시 입원 시설은 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보였어요. 성재는 입원 생활 적응을 많이 힘들어했고, 실제로 잘 관리되지도 않았어요. 잔병치레가 잦았고, 상처도 많이 났어요.”
정원석 씨가 조카와 함께 살기로 마음을 먹은 건 정년퇴직을 맞이한 이후다. 자녀들도 성장하여 독립을 시작했고, 오랫동안 배성재 씨의 어려움을 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시설에서 데리고 나와 함께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장애인을 지원하는 지역의 기관이나 제도 등에 관해 전혀 아는 것 없이 그저 둘이 여행 다니며 지내면 될 것만 같았던 그에게, 사회로 나온 조카는 그야말로 복병이었다.
잠깐만 한눈을 팔면 혼자 나가서 이웃집 택배며 배달 온 음식을 다 뜯어 버리기 일쑤였고, 정원석 씨뿐만 아니라 이웃을 불편하게 하는 행동들을 멈추지 않았다.
주변의 시선과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동 주민센터를 찾았고, 서울시발달장애인지원센터를 통해 우리 복지관이 진행하는 최중증 장애인 낮활동 사업 ‘푸르메학교’ 참여를 결정했다. 그간 배성재 씨가 보여온 모습들로 인해 의심을 거두기 어려웠지만, 한 가지 새롭게 안 사실과 더불어 조금의 기대도 생겼다.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은 배성재 씨에게 ‘처음’이 아니라, 어릴 적 행복한 기억이 시작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복지관 얘기를 곧잘 했어요. 들을 땐 정확히 몰랐는데, 알고 보니 여기였던 거예요. 성재가 어렸을 때 엄마와 함께 이 복지관을 다녔고, 그때의 행복한 기억을 계속 말하고 있었단 걸 이때 처음 안거예요. 실제로 복지관에 가보니 많은 직원이 성재를 알아보고, 서로 반가워했어요.”
작은 행복의 기억이 이끈 복지관에서의 두 번째 인연으로 배성재 씨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과격하지 않고, 내 것과 다른 사람 것을 구분하여 불편함을 주는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배성재 씨의 행복한 표정이었다.
배성재 씨는 푸르메학교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지역사회를 알아가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에게 익숙하고 행복했던 기억으로부터,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고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마음이 ‘동기’가 되어 사람들에게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복지관은 그런 배성재 씨를 위해 후원을 연계하여 생활을 돕고, 치과 진료와 여행을 지원하는 등 과거에 이어 행복한 기억을 쌓는 데 함께했다.
“복지관은 성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요. 작은 성취에도 기뻐하고, 친절하고, 애정이 깃든 관심이 느껴져요. 그동안 누구도 성재를 그렇게 보지 않았어요. 분리하고 통제하는 건 성재를 조금도 나아지게 하지 못했죠. 세상에 좋은 사람 많다고 하는 거 안 믿었는데, 복지관에 와보니 알 것 같습니다.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걸요.”
서른셋, 앞으로 더 좋은 기억을 채워갈 수 있는 충분한 나이인 배성재 씨를 바라보며 정원석 씨는 그가 더 이상 통제받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랐다. 처음에 함께 살아보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둘이었지만, 이제는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삶에 희망이 생겼다.